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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야기

콩나물을 키우는 이유

by 소금별쌤 2005. 4. 19.
초등학교때 교실에서 콩을 키운 적이 있었다.
씨앗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창가에 햇살을 듬뿍 받으며 싹을 틔운 콩들은
금새 무성한 콩나물로 성장했다.
당번이 번갈아가며 콩나물에 물을 주었는데,
그 물들은 대부분 아래로 그냥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 기억난다.
"물을 먹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쑥쑥 자라나요? "
선생님께서 내 질문에 대답하셨다.
"너는 오늘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일 기억할 수 있니?
아마 반정도 밖에 기억하지 못할거야.
그 다음 날에는 반의 반, 또 다음 날에는
반의 반의 반밖에 생각나지 않을 거고...
언젠가는 다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배우기 전의 너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거야~
콩나물도 그렇단다.
네가 너도 모르게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콩나물도 그렇게 자라나는 거야"

그 시절 이래 내가 지나온 짧은 시간들을 돌아보면,
세상은 내게 참으로 관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한 것들, 혹은 가졌다고 생각한 것들을
한순간에 상실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어떤 상실도 나를 송두리째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나에게 물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던 부모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세상에서 어른과 스승노릇을 해준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중학생 때....
그리고 웃자란 콩나물처럼 불안하기만 했던 20대 내내.....
그분들이 한시도 잊지 않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내게 부어준 물은 나를 통과하며 나를 만들었다.
내 주위에는 부모님과 갈등 때문에 방황하는 친구들도 많고,
학창시절을 통털어 존경할만한 선생님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제 배운것을 오늘 잊어버리는 아이를 사랑으로 자라나게 한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먹는 법, 입는 법, 걷는 법, 말하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책을 입는 법, 노래하는 법, 마음 다스리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
사랑을 나누어주는 법을.....
나는 모두 그들로부터 배웠다.
힘들고 지친 내가 나 자신을 포기했을 때,
나의 세계가 온통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고 쉬지 않는 그들의 사랑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부모님과 스승들이 베푼 한없는 사랑을
나는 간직하지도 못한 채 흘려보냈다.


하지만 나는 콩나물처럼 자라왔다.
나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멍멍해진다.




  - Paper 황경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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