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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야기

고흐의 일기

by 소금별쌤 2006. 6. 8.
1874, 1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화가들 중에는 좋지 않을 일은 결코 하지 않고,
나쁜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듯.

1879, 8/15

이번에 네가 다녀간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서 급히 편지를 쓴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도, 예전처럼 편지를 띄우지도 못했지.
죽은 듯 무심하게 지내는 것보다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게 얼마냐 좋으냐.
정말 죽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881, 11/10
이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나를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하지.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1882, 5/3~12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하루치 모델료를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게 힘들었지만 조금씩 배우게 되었고,
나는 좋은 모델을 가진 덕분에 데생에 진전이 있었다.

1882, 7/21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으로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1883, 3/21~28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인물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데,
그들은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류의 인간들이란" 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한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5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1888, 5 ~ 6

우리 같은 사람은 아프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아프게 되면 방금 죽은 불쌍한 관리인보다
더 고독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있고,
집안 일을 돌보면서 바보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만 하고 홀로 지내면서
가끔은 바보처럼 살고 싶어한다.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는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르지.

1888, 7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따라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거라고 말해주어라.

요즘은 너에게 그림을 보내기 위해서
조금씩 손을 보고 있는 중이다.
<수확>을 그리는 동안 밭에서 직접 수확을 하고 있는 농부보다
결코 편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1888.9.17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너에게 편지를 쓴 후
태양이 비치는 정원 그림을 그리러 나가서 작업을 마쳤다.

그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새 캔버스를 가지고 나갔고,
그것도 끝내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너에게 다시 편지를 쓰고 싶어 펜을 들었다.

1889, 1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겁이 난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은 성공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
그건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 나야 할 것 같다.

후기 인상파 화가이자
정신 분열증세로 자신의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네 살 터울의 친동생 테오와
19여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어 보면
너무나도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예술가로서의 갈등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려진
고흐의 편지는 모두 668통이나 된다.
계산해 보면 한달에 평균 두통씩 테오에게 보낸 셈이다.


신학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고흐는
27살이 되서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테오에게 뎃생 책과 그림물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 이후 고흐는 죽을 때까지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순수한 영혼의 시각을 통해
사람과 대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러나 그림이 팔리지 않아
늘 가난한 화가의 신세를 벗어날 순 없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평생 그를 괴롭히는 고통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는 진보적인 예술가들의 공통된 여정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고흐의 삶은 가장 비극적인 예술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지만
해맑은 영혼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 속에는
"불꽃같은 정열과 눈부신 색채"가 담겨 있어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킨다.

또한 고흐가 쓴 편지 역시 감동적인 까닭은
화가이면서도 음악과 사람을 사랑했으며,
또한 자신의 예술세계를 사랑했던 고흐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의 글에서 발견되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